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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경복궁14

수정전과 궐내각사 왕실 업무를 위한 관청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을 궐외각사라 하고, 궁궐에 들어와 있는 관청들은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교서관 등은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정치행정기구였다. 내반원, 상서원, 상의원, 사옹원, 사복시 등은 왕족의 생활과 활동을 보좌하던 실무 관서였다. 흠경각, 보루원, 관상감, 간의대 등은 천문과 시각을 관측하는 과학 부서였고, 도총부, 내병조, 선전관청, 충장위 등은 궁궐 수비와 왕족 경호를 맡은 군사 부서였다. 궐내각사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1867년 수정전은 왕의 출입이 빈번하여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정면에 월.. 2020. 8. 1.
경회루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 경회루는 왕이 신화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화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돌기둥만 남은 것을 1867년에 재건하였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이며, 넓이 931㎡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우고 비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중앙의 3칸 중궁 부분이 가장 높고, 그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 2020. 8. 1.
태원전 일원 왕위 정통성 확보를 위한 고종의 노력 왕자 출신이 아니었던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과 함께 왕권 승계의 정통성 시비에 대응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태원전을 지어 역대 임금의 초상인 어진을 모심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1868년(고종 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원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이후에는 명성 황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문경전은 위패를 모신 혼전으로 건립했다. 주변에 공묵재, 영사재 등 의례용 건물도 들어서 신성한 일곽을 이루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이곳은 청와대가 가깝다는 이유에선지 5 · 16쿠데타 이후 청와대 경호부대가 들어섰으며, 1979년 이른바 '경복궁 모의'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2006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왕실의 장례 왕이.. 2020. 7. 30.
집옥재 일원 청풍과 조선풍의 조화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1891년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등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2층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반면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연결되며, 각각의 특색을 지니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청풍 건축 1880년까지는 청나라가 거의 유일한 선진 문물 수입 창구였다. 이 영향으로 집옥재와 팔.. 2020.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