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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경복궁

향원정과 건청궁

by 해삐해삐해삐 2020. 7. 27.

 

향원정

 

건청궁

고종을 위해 지은 궁 안의 궁

함화당과 집경당 북쪽 후원 영역에는 향원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향원정이 있다.

경화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젅ㅇ 때 파괴된 후 지금처럼 남쪽으로 놓았다.

향원정은 세조 때 세운 취로정 터에 건청궁을 지으면서 조성한 것이다.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73년(고종 10)에 아버지 홍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전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건청궁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졌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 헐린 후 1939년에는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향원정은 보물 제17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성황후의 비극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한다.

이에 친러정책을 구사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성황후는 건청궁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깡패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찔러 죽이고 그 시신마저도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관문각 터와 전기 발상지

고종은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향원지 북쪽에는 최초의 발전소를 지어 건청궁의 밤을 밝혔고,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은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이었으나, 1891년에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으로 하여금 서양식 3층 건물로 다시 짓게 했다.

향원지의 물을 이용한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전기를 '물불'이라 불렀다 한다.

당시 전기의 도입은 에디슨전기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동아시아 최초였다.

그 무렵 에디슨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꿈만 같다!'

 

건청궁에서의 마지막 밤과 아관파천

경복궁 전각들 중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고종이 건청궁에서 생활한 것은 10년 남짓한 세월뿐이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미국공사관으로 옮겨 가려다 실패하고, 드디어 11896년 2월 11일 새벽에 변복을 한 채 세자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청와대가 된 경복궁 후원

신무문 북쪽 경복궁 후원 영역에는 융문당, 융무당과 옥련정, 경농재와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보던 내농포, 왕이 군사훈련을 점검할 수 있는 경무대 등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이 후원 영역에 총독관저를 짓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헐어 버렸다.

경복궁 후원 영역이 경복궁에서 떨어져 나간 시점이다.

총독관저는 미군정기에는 군정장관의 관저로, 그 이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다가 1960년에 '청와대'라 개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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